♧ 詩

[스크랩] 주유소/ 윤성택

달이 하이디 2009. 8. 30. 19:02

 

 

 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 월간 <문학사상> 2003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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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멈춰선 주유소에서 옛 연애를 떠올리는 건 대단한 감수성이다.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마치 연애 지상주의자의 순발력을 보는 것 같다.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아름다운 서명 하나 간직하려고 얼마나 아까운 공책들의 뒷장들을 낭비했던가. 그때는 지금처럼 카드계산서에 쓰라린 서명으로만 기능하게 될 줄 누가 알았던가.

 

 휘발성의 삶, 훨훨 타오를 것 같았던 사랑,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이 그 서명의 언약으로 수렴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가 되고 말았다.

 

 ‘라이터 없이도’ 충분히 불온했으므로 여지없이 폭발할 수 있었던 그 사랑도 그렇게 불발인 채 시간이 흐르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금털털해지기 마련.

 

 돌이켜보나마나 모든 사랑은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실종된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뜨거운 열정도 휘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단풍나무 그늘’같은 추억이거나 약간의 수면장애나 가슴통증뿐인 것.

 

 ‘기다림의 끝’에서 빵빵하게 채워진 연료는 지금이라도 다시 나를 먼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내 사랑의 피가 흐르고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이란 과연 있는 걸까. 이미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묻고 있는 건 아닐까.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고? 아니다. 아니었다. 나는 모른다. 그리운 것들의 우회로를 돌아 보일 듯 잡힐 듯 신기루 같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는 단 한번도 누구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기진한 내 사랑을 충전해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ACT4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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